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학입학 학력고사 (문단 편집) == 전형 과정 == 당시에는 대입 모집군이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어 각 한군데 씩만 지원이 가능했다.[* 그러니까 전문대를 제외하면 전기 대학, 후기 대학 2개 대학밖에는 지원을 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수능 정시와는 다른 것이 수능은 가군, 나군, 다군 등 대학 세곳과 산업대/전문대 제한없이 넣을 수 있었지만, 학력고사는 무조건 많아야 두 군데였다는 거.] 전기에 모집하는 학교가 더 많았으며 전기와 후기에 걸쳐 분할 모집하는 학교도 있었다. 선 시험 후 지원 시기에는 1년에 한번, 11월~12월에 시험을 본 후 그 점수로 전기에 지원, 전기에 탈락하면 후기에 지원했으며, 선 지원 후 시험 시기에는 대입 지원이 먼저이고 시험과 채점이 대학에서 진행되다 보니 그에 따라 시험도 전기(12월)와 후기(다음해 1월)로 2번 시행됐다. 보통은 후기 시험이 전기 시험보다 난도가 더 쉬운 편이었다.[* [[SKY(대학교)|최상위권 대학들]]과 지방거점국립대는 전기로만 모집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후기대 입시에서 합격선이 가장 높았던 곳은 문과는 성균관대 법학과, 이과는 한양대 의예과로 둘다 소수 인원만 분할 모집했던 곳이며, 서울대 인기학과 탈락자들도 여기 후기 분할에 합격하기 어려웠다. 문과는 성균관대와 한국외대가 계속 분할모집을 했던 반면에 이과는 80년대의 한양대가 분할 모집을 안한 시기도, 하더라도 의예과 제외로 한 해가 많았다. 이런 경우 이과 최고 합격선은 점수는 그대로인 채로 대학은 더 많이 내려간다. ~~그러니 이과 후기는 3수까지 해서도 떨어진 경우에나 다녔다.~~] 후기까지 끝나면 전문대학 입학 전형을 위한 별도의 학력 고사가 치러졌다. 선 지원 후 시험 시절에는 원서 접수 마감 일이면 오후 6시부터 각 방송사들이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각 대학 학과 별 지원 현황 및 경쟁률을 보도하는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이 당시에는 평일 방송 시작 시간이 5시 30분이라 이 시간대에 주로 방송되는 애니메이션이나 어린이 프로그램도 시간대가 앞당겨지는 것도 없이 그냥 [[결방]]돼 아동 시청자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선 시험 후 지원 시절에는 시험 지구가 설치된 거점 도시[* 당시 기준으로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인천직할시]], [[수원시]], [[안양시]], [[부천시]], [[의정부시]], [[성남시]], [[양주시]], [[이천시]], [[춘천시]], [[원주시]], [[강릉시]], [[청주시]], [[충주시]], [[대전직할시]], [[천안시]], [[서산시]], [[전주시]], [[이리시]], [[군산시]], [[광주직할시]], [[목포시]], [[여수시]], [[순천시]], [[대구직할시]], [[안동시]], [[구미시]], [[포항시]], [[부산직할시]], [[울산시]], [[마산시]], [[창원시]], [[진주시]], [[제주시]]. 총 34개 도시가 학력고사 거점도시였다. 직할시를 제외하고 도별로 나누면 경기도 7개시, 강원도 3개시, 충청북도 2개시, 충청남도 2개시, 전라북도 3개시, 전라남도 3개시, 경상북도 3개시, 경상남도 4개시, 제주도 1개시 등이 있다. 거점도시는 주로 비슷한 생활권끼리 권역을 나눈것으로, 예를 들어 진주시 권역이면 진주시 생할권인 [[사천시]], [[산청군]], [[삼천포시]] 등이 진주시 권역이었다.]에서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시골이나 소도시에서는 그 도의 거점도시로 가서 치러야 했다. 이를테면 [[경기도]] [[포천시|포천]]은 [[의정부시|의정부]],[* 포천은 아예 의정부와 붙어 있는 동네이다. [[제6군단|6군단]], [[제8기동사단|8사단]] 등 포천에 주둔하는 [[부대]] 장병들이 의정부로 외박을 오고 포천 시민들이 버스 타고 [[의정부역]]까지 가서 지하철을 탈 정도면 완벽한 의정부 생활권이다.] [[용인시|용인]] [[신갈동|신갈]]과 [[영덕동]], 흥덕동의 경우 [[수원]],[* 신갈동, 흥덕동 주민들은 간혹 주말에 [[수원시]] 가서 장 보고 올 정도면 말 다 한 거다. 심지어 용인에 있는 부대에 주둔하는 장병들이 수원으로 외박을 오고, 수원에 사는 사람들이 놀이공원에 갈 때는 대부분 가까운 용인의 [[에버랜드]]로 많이 간다.] [[강원도]] [[철원군|철원]]에 사는 수험생은 [[춘천시|춘천]],[* 철원은 [[의정부시]] 등 경기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지역이나(버스도 춘천 가는 것보다 서울 가는 것이 더 많이 다닐 정도), 도가 강원도라는 이유로 도청 업무 등은 춘천에 가서 봐야 한다. 남북 분단만 아니었으면 철원군이 시로 승격돼 [[평강군]], [[회양군]], [[김화군]], [[이천군]]에서 오는 수험생들을 위해 여기도 시험 지구가 생겼을 수도 있다.] [[전라남도]] [[화순군|화순]]은 [[광주광역시|광주]][* 화순과 광주는 차로 1시간 거리이다. 화순 사람들이 광주로 가서 장을 보고 올 정도이며, 광주광역시의 시계외 시내버스들 중에서도 배차 간격이 가장 짧은 게 화순가는 버스일 정도다.]까지 가서 치러야 했다. 게다가 각 도별로 시험 지구가 무조건 정해져 있어서 다른 도에 더 가까운 거점 도시가 있는 지역[* [[충청북도]] [[옥천군]], [[전라북도]] [[고창군]], [[경상남도]] [[합천군]], [[경상북도]] [[문경시|문경군]], [[울진군]]등. 충청북도 옥천군은 충청남도 대전시가, 전라북도 고창군은 [[광주광역시|광주직할시]]가, 경상남도 합천군은 [[대구광역시|대구직할시]]가, 경상북도 문경군은 [[충청북도]] [[충주시]]가, 경상북도 울진군은 [[강원도]] [[강릉시]]가 가까운 도시였다.]이나 해당 도와 다른 도의 거점 도시들 사이에 끼어 있는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논산군]], [[경기도]] [[평택시]], [[경상남도]] [[창녕군]] 등. 충청남도 논산군은 충청남도 [[대전광역시|대전시]]와 전라북도 [[익산시|이리시]], 경기도 [[평택시]]는 경기도 [[수원시]]와 충청남도 [[천안시]], 경상남도 창녕군은 대구직할시와 경상남도 [[마산시]] 사이에 끼어 있었다.]이라 하더라도 얄짤없이 그 도에 있는 거점 도시에서 봐야 했다. 때문에 시골이나 소도시 출신 수험생들은 학력고사를 보는 전 날 도시나 그 인근 도시로 가서 하룻밤 자고 시험을 봐야 했다.[* 지금이야 교통이 매우 발전해서 매우 먼거리로 가는 게 아닌 이상 아침에 버스나 기차 타고 시험장으로 갈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도로고 철도고 빈약했기 때문에...] 선 지원 후 시험 시절인 1988학년도 이후에는 일본의 [[센터시험]] 비슷하게 자기가 지망한 대학교의 지망 학과 강의실에서 시험을 보는 것이었으므로 무조건 지망 대학교까지 가야 했기에, 서울 출신 수험생들도 본인이 지망한 학교가 인 서울이 아니면, 무조건 해당 도시에서 2박(1박은 시험, 1박은 면접)을 해야 했다. 대학조차 없는 시골[* [[영양군]], [[울릉군]], [[완도군]], [[해남군]], [[보은군]], [[양구군]] 등.]이 고향이면 100% 2박 3일 원정을 가야 했다. 여기서 특히 '본인의 지망 대학의 '''지망 학과'''에서 시험을 본다'는 말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같은 강의실에서 시험을 치르는 모든 사람이 바로 경쟁자였다는 것. 이 사람들의 운명은 합격하여 서로 동기가 되거나 혹은 낙방하여 [[재수생]]이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런 관계로 멘탈 관리가 중요했는데, 예컨대 극악의 난이도였던 1991학년도 수학의 경우, 해당 수학 시험이 있던 2교시가 끝난 후 멘붕한 나머지 울며 짐을 싸고 시험을 포기하고 집으로 가버리는 수험생이 속출했던 사태가 벌어졌다. 어떤 선생님들은 '시험 보러 가서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나왔어도 쉬는 시간에 절대로 어려웠던 척 하지 말라'며 코치를 하기도 했다. 나름 심리전까지 폈던 것. 학력고사 시험 당일이면 시험이 치러지는 대학 앞에서는 수험생 말고도 수험생의 학부모들, 모교 출신 수험생들을 응원하러 나온 해당 대학 재학생들, 학부모들과 함께 수험생들을 위해 격려해 주러 온 신부들이나 승려들, 합격 기원 엿이나 찹쌀떡을 팔러 나온 잡상인 등이 몰려들어 한바탕 북새통이 벌어지곤 했다.[* 지금의 [[적성검사]] 전형을 실시하는 학교들을 생각하면 된다. 학력고사 때와는 많이 다르지만, 적성검사 시험을 보는 대학의 분위기와 흡사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시험이 끝난 다음날 면접과 신체검사가 있었다. 면접 점수가 있기는 했지만 동점자 처리에만 반영되는 정도여서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단, 교대와 사범대는 교직 적성이라는 이름으로 면접 점수가 2~5% 반영되었다. 간혹 사범대 이외에도 면접 점수를 전형에 반영하는 학교도 있었으나 실질적 반영률은 미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